나에게는 형님이 한 분 계신다. 형님은 선천성 뇌성마비 장애인이다. 장애등급 3등급이다. 병세가 심해져서 등급을 올리려고 했으나 MRI사진을 찍지 못해 등급 조정신청을 하지 못하고 있다. MRI사진을 찍으려면 기계 안에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형님한테는 불가능한 일이어서 그냥 3등급으로 지내기로 했다. 2등급으로 올라가야 장애인 콜택시를 이용할 수 있는데 어쩔 수 없어 일반택시를 이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기사님들은 잘 도와주시지만 간혹 장애인을 태운다고 노골적으로 싫어하는 분들도 있다.
형님은 화가다. 매주 수요일, 집 인근에 있는 뇌성마비 복지관에 가서 그림을 그린다. 장애인 그림대회에서 입상도 했다. 구청에서 개최하는 장애인 미술전에 출품하여 공개 전시작으로 선정이 되기도 했다. 평소에는 온갖 신경질을 내며 신세 한탄을 입에 달고 지내다가도 복지관에 가는 날 만큼은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한다.
복지관까지는 휠체어를 밀며 형님을 데리고 간다. 30분 정도 걸린다. 가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는데 가는 길 선택은 그날 형님 기분에 따른다. 휠체어에 앉아서 손가락을 까딱하면 그 길로 간다. 가끔씩 오르막이 급한 길을 선택할 때가 있다. 오르막이 급하면 내리막길도 급하기 때문데 휠체어를 미는 입장에서는 가급적 피하는 길이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힘이 무척 든다. 뒤통수를 한 대 때려주고 싶지만 모처럼의 나들이길이라 형님 기분을 맞춰주려고 노력한다.
형님과 나는 연년생이다. 형님이 초등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가면서 나하고 학교를 같이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6학년까지 같은 반에서 짝꿍을 했다. 등하교시 가방도 내가 들어주었었다. 중고등학교는 따로 다녔다. 당시 문교부에 중고등학교도 같이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도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 가방은 어머님이 들어주셨다.
형님의 남은 평생도 결국 내가 옆에 있어야겠구나 하고 어렴풋한 생각을 한 것도 이 때였을 것 같다. 그 때는 형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어머님이 형님을 보살피는 모습을 보고 어머님의 노고를 덜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형님이 점점 더 병약해지고 부모님의 신체능력도 떨어져 형을 보살피기 어려워하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본의 아니게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다. 사업을 해보겠다며 몇 년을 허비했지만 벌어둔 돈만 까먹고 생활비 감당이 안 되어 경비직으로 다시 취직을 했다.
24시간 맞교대 근무 중 쉬는 날에는 부모님을 대신에 형님을 보살피는 일을 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아버님이 섬망증상을 갑자기 보이면서 치매가 급격하게 진행이 되어 아버님까지 돌보아야만 했다. 내가 근무하는 날은 어머님이 아버님을 보살폈다. 가끔씩 팬티만 입고 가출을 감행하셔서 찾으려고 온 동네를 헤매며 애를 먹기도 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치매가 시작되신지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혼자서 중얼거리던 말씀이 생각난다. ‘자식은 부모에게서 빚 받으러 태어난다고, 동생은 형한테서 빚 받으러 태어난다고.’
작년에 경비직을 그만두게 되었다. 정년퇴직이란다. 새로운 일을 찾아보다가 문득 연로하신 어머님과 장애 형님을 보살펴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하는데 도전을 했다. 오랜만에 학원에 다니는 것이 지루하긴 했지만 신체능력이 떨어진 분들을 보살피는데 필요한, 정말 합리적으로 잘 짜인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형님을 보살피면서 간과했던 많은 부분을 다시 살피는 계기가 되었다. 학원 개근상도 받았고 요양보호사 자격도 무난히 취득을 했다.
형님은 만 65세가 되는 금년에 장기요양등급을 받았다. 3등급이다. 나는 가족요양보호사로 등록하여 형님을 보살피고 있다. 매월 몇 십만 원의 장기요양급여가 나와 부족한 생활비에 조금은 도움이 된다.
형님은 나이가 들수록 신체 각 부위별 복합장애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보청기를 끼지 않으면 옆에서 소리를 쳐도 못 알아듣는다. 발음도 점점 더 안 좋아져서 알아듣기 힘든 상황이다. 눈도 안 좋아 글을 볼 때는 눈 앞 10㎝정도는 되어야 한자 한자 읽을 수 있다. 등은 척추 전만증이 있어 허리가 거의 90°로 굽어있다. 침대에 바로 눕지도 못한다. 비스듬히 누워서 잔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는 혼자서 일어나지도 못한다. 수술이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냥 진통제 먹으면서 버티고 있다.
가끔씩 돌아가신 아버님이 혼자서 중얼거리던 말이 생각난다. ‘자식은 부모한테 빚 받으러 태어난다고....’ 그럼 동생으로 태어난 나는 형님한테서 어떤 빚을 받으러 이 세상에 온 것일까? 아버님은 형님과 나에게 빚을 다 갚고 돌아가신 걸까? 그 빚이 무엇이었을까?
어머님도 연로하셔서 신체능력이 많이 떨어지셨다. 혼자서 외출하기 어려워해서 동행할 때가 많다. 어머님 손을 잡고 걷노라면 손이 차갑다는 느낌이 들어 손을 꼭 잡아드리곤 한다. 말씀은 안하시지만 좋아하시는 듯하다. 어머님과 함께 외출할 때는 어쩔 수 없이 형님을 혼자 두어야 한다. 소파에 앉혀두고 가급적 움직이지 말라고 당부를 하고 외출을 하는데 그래도 불안하다. 보행기를 밀며 혼자서 화장실에 가다가 낙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외출한다.
어머님도 약간의 치매 끼가 있는데 어머님도 느끼고 계신 듯하다. 하지만 병원에 같이 가보자고 하면 펄쩍 뛰신다. 머리 쓰면 치매가 진행 안 된다며 스도쿠를 매일 한 문제씩 푸신다. 어머니마저 치매가 더 진행되면 자식인 내가 더 힘들어질까봐 이를 악물고 노력하시는 듯하다.
막상 형님은 가족들의 이런 노력을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 같다. 신세한탄을 시작하면 며칠씩 간다. 이해는 된다. 자기 뜻대로 되는 것이 거의 없으니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을 듯하다. 형님이 30대 때 뇌성마비 복지관에서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애들을 위해 ‘글방’을 열고 산수를 가르칠 때는 눈빛이 살아있었다. 정상인이건 장애인이건 보람 있는 일을 할 때 즐겁게 살 수 있는 듯하다. 형님이 좋아할 만한 일이 무엇일까 고민을 해보지만 병약해 진 지금 딱히 해볼 만한 것이 별로 없어 안타깝다.
형님은 자기 덕분에 요양급여를 받으니 자기한테 감사해야 한다고 씩 웃는다. 가끔씩 힘들어도 형님이 씩 웃으면 나도 기분이 좋다. 요양급여 없이 형님을 보살필 때 형님이 짜증을 내면 나도 덩달아 짜증이 났었는데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요양급여를 받으니 짜증이 줄어든다. 사람이 참 간사하다. 돈을 받으니 책임감도 더 높아지는 듯하다. 그래도 돈보다는 형님의 웃음 한 조각이 내게는 보약이다.
가슴깊이 궁금한 점이 있다. 난 형님한테 어떤 빚을 받으러 온 걸까?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빚을 갚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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